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마도 정벌 (문단 편집) ==== 조선의 원정 준비 ==== 대마도 원정을 결정한 태종은 대마도주의 사신을 함경도로 보내고, 왜구와 내통한다고 의심되는 왜인 21명의 목을 베었으며, 경상도에 거주하던 왜인 591명을 경상도에 355명, 충청도에 203명 강원도에 33명으로 나눠 보냈다. 그 과정에서 죽은 자와 자살한 자가 136명에 달했다. 또한 간첩이 있을 것을 우려해 요해지(要害地)를 지켜 행인들을 점검하고 통행증이 없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체포하게 했다. 이후 태종은 6월 9일 전국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교서를 반포했다. >병력을 기울여서 무력을 행하는 것은 과연 성현이 경계한 것이요, 죄 있는 이를 다스리고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제왕으로서 부득이한 일이라, 옛적에 성탕(成湯)이 농삿일을 제쳐 놓고 하나라를 정벌하고, 주나라 선왕(宣王)이 6월 같이 더운 때에 험윤(玁狁)을 토벌했으니, 그 일에 있어 비록 대소는 다름이 있으나, 모두가 죄를 토벌하는 행동은 한 가지라. 대마도는 본래 우리나라 땅인데,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1410)으로부터 변경에 뛰놀기 시작하여 마음대로 군민을 살해하고, 부형을 잡아 가고 그 집에 불을 질러서, 고아와 과부가 바다를 바라보고 우는 일이 해마다 없는 때가 없으니, 뜻 있는 선비와 착한 사람들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탄식하며, 그 고기를 씹고 그 가죽 위에서 자기를 생각함이 여러 해이다. >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 강헌 대왕이 용이 나는 천운에 응하여 위덕이 널리 퍼지고 빛나서,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해 주시는 덕을 입어 그렇지 않으리라 믿었더니, 그러나 그 음흉하고 탐욕 많은 버릇이 더욱 방자하여 그치지 않고, 병자년(1396)에는 동래(東萊) 병선 20여 척을 노략하고 군사를 살해하니, 내가 대통을 이어 즉위한 이후, 병술년(1406)에는 전라도에, 무자년(1408)에는 충청도에 들어와서, 혹은 운수하는 물품을 빼앗고, 혹은 병선을 불사르며 만호를 죽이기까지 하니, 그 포학함이 심하도다. 두 번째 제주에 들어와 살상함이 많았으니, 대개 사람을 좋아하는 성낸 짐승처럼 간교한 생각을 숨겨 가지고 있는 것은 신과 사람이 한 가지로 분개하는 바이지마는, 내가 도리어 널리 포용하여 더러움을 참고 교통하지 않았노라. > >그 배고픈 것도 구제했고, 그 통상을 허락하기도 했으며, 온갖 구함과 찾는 것을 수응(酬應)하여 주지 아니한 것이 없고, 다 같이 살기를 기약했더니, 뜻밖에 이제 또 우리나라의 허실을 엿보아 비인포에 몰래 들어와서 인민을 죽이고 노략한 것이 거의 3백이 넘고, 배를 불사르며 우리 장사(將士)를 해치고, 황해에 떠서 평안도까지 이르러 우리 백성들을 소란하게 하며, 장차 명나라 지경까지 범하고자 하니, 그 은혜를 잊고 의리를 배반하며, 하늘의 떳떳한 도리를 어지럽게 함이 너무 심하지 아니한가. 내가 삶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잃어버리는 것을 오히려 하늘과 땅에 죄를 얻은 것같이 두려워하거든, 하물며 이제 왜구가 탐독(貪毒)한 행동을 제멋대로 하여, 뭇 백성을 학살하여 천벌을 자청하여도 오히려 용납하고 참아서 토벌하지 못한다면, 어찌 나라에 사람이 있다 하랴. 이제 한창 농사짓는 달을 당하여 장수를 보내 출병하여, 그 죄를 바로잡으려 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아아, 신민들이여, 간흉한 무리를 쓸어 버리고 생령을 수화(水火)에서 건지고자 하여, 여기에 이해(利害)를 말하여 나의 뜻을 일반 신민들에게 널리 알리노라. 6월 19일, 원정군은 거제도 남쪽 주원방포[* 현 지명 통영시 추봉도 추원마을]를 출발했다. 이때 동원된 병선은 227척, 병력은 17,285명이었고, 함선에 실린 식량은 65일치였다. 이때 태종은 6월 8일 견내량에 집결한 함대의 출항 소식을 기다렸지만 좀처럼 오지 않자 형조 참판 홍여방을 체복사(體覆使)로 삼아 원정을 떠나지 않는 까닭을 알아보려 했지만 유정현이 17일에 이미 출항했다고 보고하자 그만뒀다. 그 후 태종은 함대가 역풍으로 인해 거제도로 돌아왔다고 하자 병조 정랑 권맹손을 경차관으로 삼고 파견해 질책하는 내용의 교지를 유정현에게 전달하게 했다. >금월 11일 갑신은 곧 발선하는 길일이거늘, 제장이 배가 떠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고, 12일 을유에 겨우 배가 떠나서 거제도에 도착하고, 17일 경인에 이르러 또 제장이 배 떠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고, 또 제장의 보고에 이르되, '17일에 배가 떠났으나, 바람에 거슬려 거제도로 돌아왔다.' 하니, 이것은 다 행군하는 큰 일이어늘, 경이 어찌하여 분변하여 장계하지 않았는가. 위에 적은 그날의 더디게 된 사유와 역풍의 진위를 속히 분변하여 장계할 것이며, 또 제장을 독촉하여 발선하게 하라. 권맹손은 명을 받들어 거제도로 내려갔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함대가 대마도로 떠난 뒤여서 교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한편 태종은 중국으로 간 왜구가 대마도로 돌아올 것을 대비해 경상, 충청, 전라 해도 각처의 조전 절제사로 하여금 각각 병선을 거느리고 요해지에 머무르면서 돌아오는 적을 요격하게 했다. 또한 일본 정부가 대마도 정벌에 대해 의혹을 제기할 것을 우려해 원정 함대가 출항한 뒤에 일본 사신을 돌려보내게 하고 일본 정부에게 일본 본토를 칠 의사가 없음을 알리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